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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 언어의 찬란함과 슬픔에 대하여

by 하늘너머 2022. 7. 13.

 

 약속 가는 길에 책을 읽으며 이탈리아에 간 지 일주일 만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에 부러움을 느꼈다. 작가 역시 서툰 실력으로 이탈리아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해 혼란함을 표현한 것이었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쓰게 될 순간이 벌써 기다려지면서도 당장 지금이 아닌 것이 아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그 날 본 영화 'After Yang'에 대해 영어로 쓰고 있었다. 똑같은 때 같은 영화를 보고 영어로 글을 쓴 친구를 발견해, 글을 주고받았다. 아래는 그 대화의 일부이다.

 

Is oblivion a curse or a blessing?

 

 I want to recall every detail of the conversation, dialogues, talks, musics, movies, exhibits, everywhere we went and everytime we spent. Much of them are gone already and that's why I want to. I couldn't remember where I met the book. I couldn't remember what we said on the street, ignoring flashing green lights.

 

 I love to talk with people I love. That conversation was the funniest thing. I know the joy of taking a walk along the river. I like to read poems and novels. What we shared became part of me and it remains inside myself. It would work same on the other side, too.

 

 I would not let uncertainty to determine volume of my memory. There were moments passed by. There were good times we spent but I don't want to remember all the griefs. Some words and scenes are still played in my mind without knowing, repeatedly. Now I capture the moments. I try my best to people I cherish. I know more than I wanted now and it would be painful to try more. I know some memory lasts forever and this is the thing. I want to remember them without acknowledging forever goodbye if I can. Otherwise, I'll let them blow away like a wind.

 

 혼자였다면 없었을 글이다. '학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한 이유이다(프랑스어 선생님의 말을 인용한다). 반대로 타인이 불필요하게 개입하는 경우도 있다. 언어를 사용할 때조차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는데, 정확히는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하는 타자의 시선이다. 있어 보이게 발음하고 있는지에 대한 집착이 말을 자유롭게 뱉을 수 없도록 한다. 프랑스어를 배우는 지금도 여전히 발음의 중요성에 대해 배우지만 이전처럼 유창하게 말함으로써 좀 더 현지인에 가깝게 보이고자 하는 노력은 아니다. 다만 정확하게 말함으로써 정확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해당 언어에 근접하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자 수단으로 발음이 동원된다. 이런 시선은 심지어는 모국어를 사용할 때도 등장하는데 지금 말하는 순간이 어떻게 보일지 끊임없이 신경 쓰는 형태였다. 발성 수업을 들어 발음이 좀 더 정확해지면(모국어를 사용하는 입장에서 발음은 문제 될 것 없으나 아나운서처럼 말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의 집중을 끌어낼 수 있을지 궁금했고 좀 더 편안하게 말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말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말을 잘하는 것을 방해했다.

 

 언어의 유창성은 때로는 언어의 전달에 아무런 연관성을 보이지 않기도 하는데,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된 이후 느낀 점이기도 했다. 언어가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미 이탈리아어를 잘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취급되었다. 미국인이자 인도 이민자 2세대로서 이탈리아인과 구분되는 겉모습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어린이의 불완전한 말을 척척 해석해 옮겨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웅얼거림을 어떻게 그토록 잘 알아들을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린이가 나이에 비해 어른처럼 말을 특출 나게 잘해서가 아니라, 무슨 말인지 들으려는 노력과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고, 함께한 시간과 깊은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리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도 다가가려는 마음이 없을 때 언어는 들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대화는 태도다. 가만히 있어도 자동 재생되는 배경음악을 틀어놓는 것과 음악가와 마음을 주고받으며 느끼는 감동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p.116)
글을 쓸 때 내 모습, 내 이름은 상관없다. 보이는 것과 무관하게 편견 없이 여과 없이 내 말이 전달된다.
난 보이지 않는다. 난 내 말이 되고, 말이 내가 된다.

 

 이것이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여성 작가들이 아직도 필명을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언어는 많은 것의 본질을 꿰뚫는다. 우리는 자주 사랑을, 함께함을, 영원함을, 미래의 찬란함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사랑'이, '함께함'이, '미래'가, 이 모든 것의 정의가 오차 없이 똑같은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지. 특히 사랑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지는지. 이 언어의 차이가 마치 평행선 같다고 느낀 날,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작가에게 벵골어, 영어, 이탈리아어라는 언어의 삼각형이 존재한다면, 내가 관여하는 언어는 한국어-사투리, 한국어-서울말, 영어, 프랑스어이다. 사투리를 쓰던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로 이사 오면서부터 '표준어 사용하기 작전'은 시작되었다. 촉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말이 많았고, 목소리 톤은 지금보다 낮았고, 말의 속도는 더 빨랐다. 지금 하는 말이 사투리에 가까울지 서울말에 가까울지 가늠하느라 말하는 속도가 느려졌고, 사투리로 들리는 억양을 지우고 서울말에 가까운 부분을 골라내어 말했고, 그렇게 부산이 시골이라는 아이들 틈에서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 사투리가 모국어인 셈이었는데 지금은 그것과 멀어져 가끔 어색하기도 하다. 하지만 본질적인 자아는 사투리를 쓰던 자아와 닿아 있었다. 애써 스스로를 어떤 틀에 맞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서울말은 적응이었고 영어는 오랜 기간에 걸쳐 그나마 편해진 외국어였으며 프랑스어는 원해온 것들이었다.

 

 오후에 영어회화 학원에 보조 강사로 레벨 테스트를 받으러 간다. 어법에 오류가 없다거나 말을 실제로 잘한다거나 하는 것은 어떠한 영향도 없을 수 있다. 정말로 듣고 싶은가? 이 사람과 상호작용 할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가? 오랜만에 영어로 말할 시간에 들뜨는 마음만을 준비해서 간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긴장감은 필요하지 않다.

 

* 이 책을 추천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린다.